40대가 된 밀레니얼 세대는 진짜 어른이 되는 법을 배우고 있다
어릴 때는 세상의 모든 곳에서 담배 냄새가 났다.
그런 시절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비행기에서, 택시에서, 심지어 버거킹에서도 담배를 피울 수 있었다.
나는 아홉 살 때 첫 담배를 피웠다.
연기를 들이마시고 내뱉는 과정이 몹시 고통스러웠고, 눈물 콧물을 쏟으며 발작적인 기침을 미친 듯이 해야 했으나 몇 번의 시도 끝에 나는 흡연에 성공할 수 있었다. 독학 조기교육이라 불러야 하려나. 한적한 저녁 시간, 롤러블레이드를 탄 채 8자를 그리며 이웃집 화단에 꽁초를 버리는 열 살짜리 여자아이의 모습을 상상해보라. 그게 나였다. 밤에는 혼자 자전거를 타다 말고 담배를 꺼냈다.
그건 자유였다. 낮에는 피아노 학원을 마친 뒤 엄마가 나를 데리러 오길 기다리며 담배를 피웠다.
그러다 보면 마음이 느긋해졌다. 담배 수급은 이모를 통해 이뤄졌다.
이모는 항상 담배를 몇 보루씩 사서 쌓아뒀기 때문에 한두 갑씩 사라져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나는 왜 그 어린 나이에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던가? 흡연을 하는 모습이 멋있어 보였다거나, 빨리 자라고 싶다거나 하는 이유는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 무렵 나는 흡연이 성장을 저해한다는 뉴스 기사를 접했다. 그리고 그날 이모의 담배를 훔쳤다. 나는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누가 나를 탓할 수 있을까? 나는 우리 세대의 시작점인 1981년에 태어났다.
예전 천 년 동안 이전의 다른 세대들이 미래에 대해 가져본 적이 없던 고민들을 붙들고 씨름하도록 강요당한 순진한 어린아이들, 바로 밀레니얼 세대들 말이다. 프린스는 우리의 말썽을 기리는 ‘1999’라는 곡을 썼다. 불안정한 하루하루였다.
게다가 나는 불안에서는 영재였다. 기이할 정도로 성숙했고 자의식이 굉장히 강해 중독에도 쉽게 넘어갔다.
나는 자궁에서 나오던 그 순간부터 엄청난 긴장감을 안고 있었던 것 같다.
겉으로 보기엔 나는 성취도가 높은 내향적 인간이었을 것이다.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물건을 파는 방문판매 사원처럼, 나는 아침이면 충실하게 책가방을 싸 들고 학교까지 걸어갔다. 존재적 두려움의 무게를 어깨에 짊어진 채였다.
가끔은 나무 뒤에 숨거나 남의 집 뒤뜰을 가로질러 가면서 담배를 피웠다.
당시에는 이런 행동에 대한 진단을 내려줄 아동심리학자도 없었고, 애초에 이를 병리학적으로 지켜보는 시선 자체가 없었다.
어린아이의 흡연은 그냥 ‘불량한’ 것이었다. 열한 살이 되기 직전에 나는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에서 너바나의 공연을 본 다음 큰언니를 돌아보며 말했다. “봤지? 중요한 건 아무것도 없어.” 2년 뒤 커트 코베인이 자살했을 때 나는 울지 않았다.
그저 담배에 불을 붙이곤 허무주의만이 최고의 철학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니코틴은 한 가지 생각을 굳히는 데 좋은 도구다. 담배를 피우다 보면 감정을 신조로 바꿀 수 있었다.
흡연이 나를 죽게 할지는 별 상관없게 느껴졌다. 내가 어차피 그다지 오래 살 거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담배를 살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 나는 이미 인생의 절반을 흡연자로 산 뒤였다.이제 내 또래 밀레니얼들처럼, 나 역시 중년에 접어드는 현실을 억지로 마주하게 되었다. 마흔 살이 되었지만 중년이라는 기분은 들지 않는다.
나는 자녀가 없다. 내 명의의 집을 가지고 결혼도 했지만, 나와 남편은 주식을 확인하거나 뉴스를 보기보다는 팝콘을 만들고 레슬링을 하며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집이 깨끗하지도 않고 의사인 친구도 없다.
베이지색 러그가 깔려 있지도 않다. 내가 어릴 때 생각한 중년이란 그런 것이었다.
재미없고 잘 짜인 삶을 사는 중산층, 영화 〈페리스의 해방〉에 나오는 부모들 같은 모습.
나는 설탕 대신 열량이 낮은 스테비아를 쓰지도 않고, 취미 삼아 운동을 하지도 않는다.
지금도 여드름이 나고, 만화를 보며, 고통스러운 자제를 통해 열세 살 때 체중을 유지하고 있다. 이런 무의미한 방식들 덕분에 나는 젊음을 유지하고 있다.
동시에 내 젊음은 헛되이 낭비되었다. 나는 니코틴에만 중독된 게 아니었다.
나는 지하실에서 텔레비전을 보면서 줄넘기를 하려고 새벽 네 시에 일어나곤 했다. 불안이 너무 심했기에, 나는 불안을 지쳐 떨어지게 만드는 데 인생의 대부분을 보냈다.
고등학교에 다닐 무렵에는 모든 게 다 싫었고, 그 어떤 주제의 대화도 하고 싶지 않았다.
고통스러울 정도로 꽉 쥔 완벽주의의 주먹 안에 모든 긍정적인 열망을 단단히 욱여넣어 둔 채 지냈다.
그때도 지금 가진 만큼의 재능을 갖고 있었지만, 표현할 수단이 없었기에 미쳐버릴 것 같았다.
나는 연기 구름 속에 들어가 이 상황을 피하고자 했고, 부모님이 의심하지 않도록 그들과 거리를 두었다.
절대 “행복하지 않아”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존 휴즈의 영화 속 캐릭터였다면, 방에서 나오지 않는 어린 여동생 혹은 언어를 배우려 하지 않는 교환학생이었을 것이다.
나는 결코 아무 걱정이 없거나 멋지지 못했다. 파티에서도 절대 춤을 추지 않았고 절대 신나게 놀지 않았다. 집에서 아무 걱정 없고 멋진 사람들을 텔레비전으로 보는 편이 나았다.
어른이 되는 걸 미루고 싶은 이유는,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우리는 죽고 싶지 않고, 우리 부모처럼 되고 싶지 않다.
가끔 이런 욕망끼리 부딪혀 서로를 상쇄한다는 것이 아이러니다. 성장하기를 거부했더니 역설적인 결과들이 생겼다.
예를 들어 열세 살 때의 체중을 유지하기 위해 한 단호한 노력들로 인해 내 뼈는 원래 나이보다 노화하고 말았다.
완벽주의는 모든 것을 통제해야 하는 불안함으로 바뀌었는데, 이것은 굉장히 짜증스러운 불완전함이었다.
페미닌하다거나, 매니시하다거나, 러블리하다거나 하는 수식어가 붙는 일반적인 성인 여성 패션에 대한 반발심으로 나는 입지 않는 황당한 옷과 주얼리를 엄청나게 많이 구매했다.
평범한 날의 내 모습은 피자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는 10대 아이 같았다.
빨간 윈드브레이커, 배기 진, 더러운 스니커즈까지. 내가 ‘아이’라고 표현한 것에 주목하라. 그렇다. 나는 ‘아이’이고 싶었다. 성인 여성이 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음모가 자라는 걸 발견했을 때 밀어버렸다.
순진함에는 힘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는 세상의 많은 것에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 ‘계속 작은 채로 있어. 그러면 안전할 수 있어.’ 나는 내게 말하곤 했다.
어쩌다 보니 우리 가족들 중 키가 가장 큰 여성이 되었지만, 흡연이 내 성장을 저해한 것은 사실이다.
거의 30년 동안, 나는 내 삶에서의 문제를 피하기 위한 핑계로 니코틴 중독을 써먹었다.
싸우다가 방 밖으로 나갔고,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걸 부정했으며, 지금 짊어진 책임 위에 더 많은 짐을 얹지 않기 위해 최대한 나를 아프고 나약하게 만드는 데 담배를 이용했다. 나는 회피했다. 타임아웃을 썼다.
책임에 나서야 하는 절정의 순간이 되면 "5분만!”을 외쳤다. 그래서 나는 젊음을 유지했다. 나머지 세상 전체와 거리를 두고, 투덜거리며 신음했으며, 다른 모든 문제를 남 탓으로 돌렸다. 아주 미성숙한 일이다. 겉으로 보기에 어떨지 몰라도, 담배를 피우며 한숨 돌리는 것은 정직한 사색의 시간이라고 보긴 어렵다. 니코틴은 나를 맞서야 할 공포의 정반대 방향으로 안내했다.
그건 언제나 가장 게으른 어딘가였다. 작년까지 나는 버거움을 느끼거나, 지루하거나, 피곤한 상황이 닥치면 담배에 불을 붙이고 캔디 크러시를 켰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날 불편하게 만드는 일을 할 필요는 없어.
사실 해선 안 돼. 나를 지키기 위해 본능을 따르고 계속 담배를 피워야 해’.
담배를 피우며 내가 자유를 느꼈던 건 내가 스스로의 필멸성을 무시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기꺼이 망상을 하며 즐기려 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도움이 되는 망상이 있었다.
나를 새로운 아이디어, 형식, 철학으로 이끌어주는 망상이 있었다. 그러나 유독한 망상도 있었다. 나는 흡연이 내 건강을 망치고 나를 죽음으로 이끌 것을 알고 있었지만, 동시에 담배를 피우면 영원히 살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매달리기도 했다. 이런 인지부조화는 담배를 입에 무는 순간마다 나를 불편하게 했다.
그 때마다 나는 ‘내가 세계 최초로 영생을 누리는 사람이 되지 않으리란 법이 있나?’라고 생각했다. 니코틴 의존에 대한 핑계를 만들기 위해 꽤나 오만한 망상을 한 셈이다. 이런 근거 없는 자신감을 전부 다 버릴 수 있는지 아직 확신이 들지는 않지만, 내가 지난해 12월에 금연을 결심한 건 죽고 싶지 않아서는 아니었다.
영원히 살고 싶다는 생각이 더 이상 들지 않아서였다. 담배를 끊으며 내 불안이 줄어든 것은 아니지만, 나는 금연을 하면서 내 또래의 밀레니얼 세대에게 좀 더 진심으로 공감할 수 있게 됐다. 알고 보니 그들은 모두 불안했다.
다들 좀 괴상하고, 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지금의 세상이 얼마나 미친 곳으로 보이는지 생각해보면, 우리 세대의 불안은 어쩌면 아주 정상인 것 같다. 그게 어른의 삶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가 가진 이상하고 불합리한 것들이 일반적인 세상 속에서 자기 자리를 찾을 때, 우리는 더 이상 아이가 아닌 것이다.
출처 : 에스콰이어